월랑성당 신축공사

<회상하시오. 반복하지 않으려거든...>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인용한  프로이드의 이 말은 기억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한다.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차이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자아는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반복해왔나 곰곰이 되집어 봐야 한다. 그래서 기억은 본질적인 무엇이고, 우리의 삶 언저리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주춧돌 같은 것이다.탈근대의 버팀목 중 하나가 되어준 차이 이론은 이렇게 기억의 프로세스를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반면 기억으로부터 시작한 차이이론은 도시와 건축과 환경에 무엇을 남겨왔을까?  차이 이론은 기억의 가치를 보존하는 대신 그것을 폐기하고 그것을 뛰어넘기를 종용한다. 그래서, 회귀를 발산으로 돌리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동경하게 만들고, 그래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을 권고하지만, 그 발산 너머의 무엇에 대해선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한다.아마도 이 이론은 그것을 만들어 낸 들뢰즈의 삶과도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 이론은 반복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 그래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기 보다는 자기의 의지만으로 살아가 죽음까지도 자기가 선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이론이었는지 모른다. _차이이론은 프랙탈이나 주름과 같은(자연의 형상) 존재의 동적 흐름이 이미지에 고착되고, 시간적으로 단속된 형태가 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이 이론은 그가 그토록 경외해 마지 않았던, 라이프니쯔의 그것과는 다르다. 라이프니쯔는 차이를 긍정할 지언정 죽음마저 긍정으로 돌려 놓치는 않았다. 라이프니쯔 모나드의 그물은 좀 더 넓고, 좀 더 촘촘하다. 비판받아오던 예정조화설 조차 삶을 고착화시키고, 획일화시키기 보다, 삶의 울타리 안에서 삶을 성찰하고, 무한과 유한이 조우하고 그것을 존재의 축복으로 돌릴 수 있게 하였다.      “현재는 미래를 잉태하고, 미래는 과거에서 읽을 수 있고, 멀리 떨어진 것은 가까이 있는 것에서 표현된다.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서만 느낄 수 있는 만물의 주름 펼침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다.” 라이프니쯔 <이성에 근거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에서      오늘 그리이스의 소박한 지역건축에 대한 경외감으로부터 시작한 월랑성당의 사진을 잡지사에 보냈다. 나는 이 건축이 낯설고 새롭고 현대적이길 바라지 않았다. 대신 시골에서 소수의 신앙공동체로 신앙을 지켜온 온 이들의 기억 속에 편안하고 익숙하고 그래서 아늑하며, 들과 산과 하나가 되어 땅과 존재의 기억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하느님의 소박한 매개체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기억의 단상 _ 월랑성당 >
성당건축에서 기억이란 무엇인가? 많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과감한 조형적 모험, 개념적 질서의 재편을 통해 지어진 건물을 훌륭한 건축이라고 한다.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것에 대한 실험들은 일반 대중과 조우할 때의 마찰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건축가들은 현대 예술 현대의 조형미에서 많은 의미를 찾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선뜻 그 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조형미에 동의하지 못하고 그래서 현대 건축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좋은 건축은 어디로부터 오는가?좋은 성당 건축은 어디로부터 오는가?건축이 외적인 평가로부터 한걸음 물러설 때, 건축이라는 하나의 영역 역시 개개인의 내면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내면이라는 것이 결국 그가 가진 기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억이란. 한 인간의 삶으로부터 성취된 경험으로부터 나오기도 하지만, 한 인간이 존재하기까지 오랜 기간 즉 수백 수천만년의 기억이 내재되어 이루어진 유전적 질서의 총체가 되기도 하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고 그러므로서 절대자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절대자란 자기를 이루는 근원적인 무엇이고, 또한 자신을 존재케 하기 위한 기억의 질서이기도 하다. 종교건축은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러므로서 절대자를 느끼고, 절대자와 대화하고, 그래서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또 자기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반추해 보는 공간이어야 함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종교건축에서 과감한 새로움이란 의미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종교건축은 내면으로부터 또,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